동성스님의 선화세계
미술평론가, 철박 / 김 영 재
동성스님의 달마도는 분명한 상호와 인상이라는 식별표지와 함께 깨달음과 자유의 표상을 보여준다. 다른 말로 하면 알아볼 수 있는 요소(Recognizable factors)와 일관된 도상의 세계를 표방하면서도 직관과 집중의 사상을 암시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선종에서 말하는 여래선(如來禪)의 세계와 조사선(祖師禪)의 세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달관의 경지이다.

먼저 스님의 달마도가 여래선적으로 비치는 이유는 유년기부터 역대 조사상 위시한 달마대사, 나한상, 한산, 습득, 풍간, 포대화상등 기존의 성상(聖像)들을 모사하였다.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의 선승이나 화승들이 그렸던 선화까지도 섭렵하면서 이는 화두처럼 스님의 화면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러한 도상적 바탕 위에서 한층 심화된 스님의 선화(禪畵)의 세계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동성스님은 상징적 파격이라는 말을 쓴다.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만큼 익숙한 달마상이기에 스스로 그 표피적인 균제의 미를 깨뜨린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표의적이고 상징적인 파격이 대두 된다. 붓가는 대로, 마음이 이어지는 대로 그어지는 선이 내밀한 상징언어를 흐트러뜨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파격이다. 그 또한 조사선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스님에게 회화는 곧 수행이다. 그러나 회화를 수행으로 등식화하기보다는 수행+ω=>선(禪) <=선화+ω라 할만하다. 선을 위해 화두를 든다. 그것이 선화를 그리기 위해 향을 피우고 먹을 가는 자세와 같다는 것이다. 그 오메가(ω)가 무엇인가. 선정삼매가 게 아닌가. 오직 사람의 본성만을 본다하여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인심(人心)이 불심(佛心)이니 인심을 보는 것이 부처에 이르는 길이라 했다. 곧 견성성불(見性成佛)이 그러하다.

그런데 왜 달마에 집착하는가. 그것은 현상과 형상, 상징과 의미를 뛰어넘는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행동반경 속에서 행위의 결과로 표출되는 것이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작품이다. 달마를 그리면 우리는 달마도라 한다. 그것을 뛰어넘어 인간적인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바로 동성스님의 자유이다.

선화를 그리는 것이 선정삼매에 드는 법이고 자신의 마음을 찾는 것이라면 선화는 뗏목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 아닌가. 언젠가 동성스님은 뗏목도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뗏목은 동성스님에게서는 떠나되 후인과 학인을 위하여 다시 조사선을 향하는 기틀이 될 것이다.

1996년 5월